
지난 4일, 장안구 광교산 자락에 위치한 수원 보훈원을 방문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베트남 참전 용사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서다. 이곳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이 여생을 보내는 실버타운이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베트남 참전 용사들은 50여 년 전 치열했던 전쟁의 기억을 생생하게 들려주며 "우리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필자는 참전 용사 두 분을 만났다. 한 분은 1947년생 윤길수 선생님으로, 우리 나이로 78세이다.

Q. 윤 선생님, 반갑습니다. 공산주의를 저지하기 위해 베트남에 파병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A. 청량리에서 출발한 기차가 부산역에 도착한 뒤 미군 수송선으로 갈아타 1주일간 항해했다. 심한 파도로 인해 전 부대원이 오열하며 뱃멀미와 구토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1968년에 파병되어 맹호부대 32사단(사단장 윤필용) 수색중대 6소대에 배속되어 비어우산, 붕따우 전투에 투입되어 밤낮없이 싸웠다. 평야에는 베트콩이 잘 보이지 않아 동굴과 땅굴을 찾아다녔다. 전투는 매우 치열했고, 고온의 환경은 견디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건 죽어가는 전우가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진다.
지난 2일에는 보훈원 단체로 동작동 현충원을 참배했다. 먼저 간 전우들을 생각하며 눈물만 났다. 정글에서 적군을 격퇴하기 위해 함께 싸웠던 전우들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전투가 치열하다 보니 상사들이 전사하기도 했다. 부사관이던 내가 중위로 승진해 소대장 직을 맡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이렇게 나라가 잘 살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도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

또 한 분은 1943년생 박충용 선생님으로, 82세이다.
Q. 박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은 일반 보병과는 다른 직책으로 전투에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A. 맹호부대 창설 요원으로 베트남 전투에 참가했다. 내 직책은 통신병이었다. 보병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전선을 가설해 지휘망이 원활히 운용되도록 했다. 그래서 적들은 통신병을 주요 표적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통신병은 무전기를 운용하고 전선을 연결하는 일을 맡았다. 통신병 임무를 마친 뒤에는 소총을 들고 베트콩 전투에 직접 참여했다. 어느 전투나 마찬가지로 매우 치열했고, 밤낮 구분 없이 싸웠다. 파병된 1년 동안 레이션(야전 식량)만 먹었는데, 된장과 김치가 있는 밥이 정말 그리웠다. 밥을 먹지 못하니 원기가 없었다. 1년 만에 소원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중 높은 곳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쳤지만,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제대 후 고향인 오산에서 여러 일을 했다. 이어령 박사의 아버지께 서예를 배우기도 했고, 엔진 기술을 익혀 버스회사에서 정비사로 근무했다. 결혼 후에는 아내와 함께 '평화 한복'을 운영하며 10명가량의 직원이 일할 정도로 번창했다. 서울 광장시장에서 원단을 사 와 아내가 오산에서 한복을 지어 팔았는데, 큰 수익을 냈다. 새벽같이 서울에 가서 원단을 사 오는 것이 내 일상이었다. 당시엔 일밖에 몰랐다.
그 후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되어 건설공사 소장의 8기통 승용차를 보링하는 일을 맡아 3년간 성실히 근무했으며 대우도 좋았다. 전역 후 다양한 일을 했지만, 가장 보람된 일은 파월 장병들을 모아 친목회를 구성하고 전우애를 이어간 것이다. 현재 회원이 40명에 달한다.
두 분과의 2시간 인터뷰에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박충용 선생님은 평생 하고 싶었던 말을 처음으로 다 표현했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얼굴에는 눈물이 글썽였고, 듣는 필자도 마음이 뭉클해졌다. 얼마나 한이 쌓였을지 짐작이 갔다. 두 분은 노년에 이렇게 편안한 곳에서 안식할 수 있음에 국가에 깊은 감사를 표했다.

주변 경관은 참 평화로웠다. 광교산 자락으로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숲속에 자리한 복지 타운은 편안함 그 자체였다. 식당에서 식사하는 어르신들의 표정도 밝았고, 휴게실에서 오가는 대화도 활기찼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지원뿐 아니라 보훈원 직원들의 진심 어린 정성과 마음가짐 덕분이라 생각된다. 실내 정원은 물론, 숲속 자연 환경도 어르신들의 휴식에 안성맞춤이었다.
무엇보다 원내 병원이 있어 언제든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위중할 경우에는 큰 병원으로 신속히 이송할 수 있는 체계도 갖추고 있었다. 취재를 마친 나는 어르신들의 노후가 더욱 편안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귀가길에 올랐다.